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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이야기

카타르 월드컵 손홍민 과 아버지 손웅정 이야기

by 오리엔탈웨이브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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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카타르 월드컵에 보면서 축구가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모두가 승리하고 우승하고 싶지만 1등의 자리는 하나뿐...

​하지만 경기에서 이길 수도 있고, 질 때도 있지만

그런 실패들을 경험 삼아 더 연구하고 땀 흘려 노력하여 다음을

준비하는 우리 ~

그리고 열심히 뛰고 있는 선수들을 우리는 밤잠을 설치면서

응원하면서 우리의 일상도 누군가 우리를 응원하기를....

K리그 시절의 손옹정

1962년 서산에서 태어나 축구를 좋아한 한 소년이 있었다.

그에게 축구는 곧 그의 인생이었다.

축구공만 보면 그저 좋았고 축구만 하면 너무나 행복했다.

늘 축구만 생각하며 살던 그는 중학교 때 춘천으로 전학을 갔고,

춘천고를 졸업한 후 명지대에 들어가 명지대를 축구 명문인 최정상에 올려놓았다.

명지대 졸업 후 상무에 입대하여 2년간 복무 후 프로구단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출장하며 다섯 골을 몰아친 그는

1986년 대한민국 U23 브라질 순회 축구 대회 대표로도 뛰며

촉망받는 선수였다.

그러나 그는 1988년 부상을 당했다.박종환 일화팀 감독은

그를 일화 천마에 입단시켰고,2년 동안 조커로 그라운드를 누비게 했다.

그러나 또다시 부상으로 28세라는 이른 나이에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그는 은퇴 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용직 막노동, 헬스 트레이너,

초등학교 방과 후강사, 시설관리 일 등 투잡, 쓰리잡을 뛰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지게를 지고

공사판 계단을 오르면서 처음에는 누가 알아볼까 봐

내심 위축되고 창피하기도 했다.

왕년에 프로선수로 뛰던 자신이  막노동판에서 일한다고

수군대는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남들이 하는 소리에 잠깐이나마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태어날 때부터 프로선수였던 것도 아닌데,프로로 좀 뛰었다고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게 삶이 교만하고 오만하다는 증거였다.

왕년에 뭘 했든 그에겐  처자식 입을 거리 먹을거리

챙기지 못하는 놈팽이가 될 바에야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중요했다.

공사판 막노동은 그에게 삶을 성찰하고 현재의 그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궁핍한 살림 속에서도 운동과 독서만큼은 단 하루도 빼먹지 않았고,

막노동을 나가는 날에도 운동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새벽 3시 만에라도 일어나 개인 운동을 했다.

두 아들이랑 운동은 같이 했지만,

축구를 강요하지 않았고, 아이들 스스로 가르쳐 달라고 할 때까지 기다렸다.

마음껏 뛰어놀던 아들은 축구를 택했다.

쉬운 길이 아님을 보통 각오로는 할 없다는 이야기로

재차 묻고 확인했지만, 어린 아들은

축구 앞에서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두 아들에게 축구훈련을 혹독하게 시키자 사람들은 손가락질했다.

집도 가난한 주제에 애들이랑 운동장에서

한가하게 공이나 차고 있다며, 한심한 놈, 미친놈

소리를 늘 들어야 했다.

제도권 밖에서 개인 훈련만 시키는 그에게

'정신 나갔다'라는 소리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그는 선수 시절 측면 공격수로 뛰는 프로선수였지만,

선수 한 명 제칠 발기술이나 개인기를 전혀 완성시키지 못했었다.

축구를 좋아했지만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축구였고,

스피드 하나 믿고 있던 축구였다.

기본기가 없었고 그래도 성적은 내야 했기에

죽기 살기로 뛰었고, 그러다 보니 몸은 금방 망가져 갔다.

그래서 '나처럼 하면 안 된다'라며

아이들에게만큼은 정반대의 시스템을 갖추고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 기 본 기 다 지 기] 였다.

아이들에게 7년간은 슈팅을 전혀 못하게 하고,

기본기만 죽어라 연습시켰다.

양발을 사용하게 하기 위해 양발 연습을 시키고,

모든 생활 습관도 왼손을 먼저 사용하게 했다.

선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본기와 인성이기에 꾸준하고 끈질긴 노력

감사와 존중의 마음, 겸손하고 성실한 태도를 강조하며,

두 아들의 축구를 직접 지도했고,유소년 축구 교육센터

'손 축구아카데미'를 설립 하기도 했다.

그가 누구인가?

그는 바로 전 축구선수이자

축구 감독 그리고 손홍민 선수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손웅정] 이다.

그의 저서

"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축구에 왕도란 없습니다."

손흥민이 데뷔골을 넣었을 때 사람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선수'라고 표현했습니다.

" 저는 그 누구보다 그 어떤 분야에서도

'혜성은 없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혜성같이 나타난 선수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기본기가

그때, 비로소 발현된 것일 뿐입니다. " 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기본기이다.

축구보다 인성이 더 중요하다.

화려한 기술을 익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훌륭한 인성을 갖추어 인생을 겸손과 감사 성실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한다.

축구를 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먼저 인성이 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를 강조했다.

혜성같이 갑자기 나온다는 것은 굉장히 희박한 일이겠죠!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며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비로소 그때를 만나 '혜성'이 됩니다.

내 주변에도 운동하시는 분, 공부하시는 분,

자격증이나 시험을 준비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하루하루 고되게 훈련하고 시합하고 공부하며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도 가족, 친구, 동료를

격려와 칭찬으로 응원하는 것이 최고의 지지가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 손흥민 에세이 일부 발췌 >

1. 우리집은 가난했다.

내가 갓난아이였을 때는 컨테이너에 산 적도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두세 가지 돈벌이를 하시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다. 학원은 꿈도 꾸지 못했고, 또래 아이들에게는 일상적이었을 게임이나 여행, 놀 거리들을 나는 별로 해 본 기억이 없다.

축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께서 나를 데리고 다녀야 한다며 소형 중고차 한 대를 구해오셨다. 120만 원을 주셨다고 했다. 비가 오면 창문 틈으로 빗물이 줄줄 샜지만 그래도 자가용이 생겼다며 우리 가족은 좋아했다.

하지만 세상은 정말 차가웠다. 주위에서 아버지가 '똥차'를 몰고 다닌다며 손가락질을 했다.

2. 17세 함부르크 유소년 시절

독일 유소년 구단 시절은 참 힘들게 버텼다.

한국 식당에 갈 돈이 없어서 허기를 꾹꾹 참았다.

유럽에서 뛴다는 판타지의 실사판은 늘 배고픈 일상이었다.

구단 전용 숙소에서 지내야 했는데 나처럼 없는 형편에는 감사했으나, 숙소의 식사가 한국인 청소년에게는 너무 부실했다. 시내 한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기엔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불가능했다. 한국 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 인터넷으로 음식 사진을 검색해 구경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부모님께는 걱정하실까 봐 그런 얘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가 한국일을 정리하고 있는 돈 없는 돈 전부 끌어모아 독일까지 날아오셔서 숙소 근처의 가장 싼 호텔을 거처로 삼으셨다.

그때까지 유소년 신분이었던 나는 보수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1군 선수가 되고, 분데스리가에서 골을 넣고, 함부르크 팬들을 열광시킬 때도 나와 아버지는 어렵게 지냈다. 가족과 함께 지낼 집도 없었고, 아버지는 자동차가 없어서 매일 호텔과 클럽하우스, 훈련장 사이를 몇 시간씩 걸어 다니셨다. 훈련이 시작되면 갈 곳이 없어 혼자 밖에서 몇 시간씩 추위를 견디며 기다리셨다. 비를 피할 곳도 없었다.

내가 함부르크 1군에서 막 데뷔했을 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내 실제 생활은 정말 차이가 컸다.

함부르크에서 골을 넣고,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2011 아시안 컵에 출전하고,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며 한국 언론으로부터 칭찬이 쏟아질 때도 나와 우리 가족은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숙소에서 사감 선생님의 눈을 피해 밥솥을 벽장 안에, 밑반찬을 책상 아래 숨기며 생활했다. '라이징 스타' 아들을 둔 아버지는 매일 몇 시간씩 추위를 뚫고 먼 거리를 걸어 다녔고, 어머니는 한국에서 매일 마음 졸이며 기도만 하셨다.

TV 뉴스에서도 자주 등장했던 신성 손흥민의 일상은 대중의 짐작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3. 2019년 프리미어리그 시절

‘2019년의 손흥민은 그럴듯해 보이는 사람이에요. 프리미어 리그의 인기 팀에서 뛰는 프로 축구선수죠.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대에서 뛰어봤어요. 남들이 보기에 이런 제 모습이 화려해 보일지 몰라요.하지만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겉모습입니다.

힘들었던 과거와 뒤에서 이루어지는 노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죠. 지금까지 어려웠던 날이 훨씬 많았어요. 좌절하고 눈물을 흘린 순간도 많았고요.

사실 지금도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살고 있어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죠.

제 인생에서 공짜로 얻은 건 하나도 없었어요.

드리블, 슈팅, 컨디션 유지, 부상 방지 전부 죽어라 노력해서 얻은 결과물이라고 믿어요. 어제 값을 치른 대가를 오늘 받고, 내일 받을 대가를 위해서 오늘 먼저 값을 치릅니다. 후불은 없죠.

저는 지금 자제하고 훈련하면서 꿈을 향해 달리고 있어요.’

2022  손흥민의 고향인 강원도 춘천엔 손흥민 이름을 딴 축구 공원이 있습니다.

 어릴 적 여기저기 운동장을 전전했던 손흥민이 후배들을 위해 내준 공간입니다.

 손흥민 선수 가족이 170억 원을 들여 축구장은 물론 어린 선수들이 공부하는 교실까지 갖췄고,

 올해는 준공기념을 겸해 6개국 100여 명 선수가 참가하는 국제 유소년 축구대회도 열었습니다.

 유소년 축구대회장에서 만난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 감독.

 운동장에서는 언제나 열정적입니다.

 "볼 끌지 마! 볼 끌지 마! 간결하게 처리해, 간결하게 처리해."

 아들이 아시안 선수 최초 EPL 득점왕을 차지했지만, 아버지에게는 언제나 부족해 보입니다.

 [손웅정 감독 / 손흥민 선수 아버지 : (손흥민 선수는 아직 월드클래스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그 생각 변함없으세요?) 저는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월드클래스요? 글쎄요 전 세계에 최고의 클럽에 가서 생존할 수 있는 수준? 모든 분야에 10% 정도만 더 성장하면 가능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득점왕을 앞두고 내심 두렵기까지 했던 아버지는 이제 초심과 겸손, 그리고 성실을 이야기합니다.

 [손웅정 감독 / 손흥민 아버지 : (득점왕 때 어떤 기분?) 분데스리가 데뷔 골을 넣었을 때만큼 두려웠어요. 올해 풍년 들었다고 내년도 풍년 든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내년에 흉년 들었을 때를 대비해서 더 근검절약하고 분수에 맞게 준비해야….]

 그러면서 자신과 달리 아들은 부상 없이 원하는 곳에서 행복한 축구를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습니다.

 [손웅정 감독 / 손흥민 아버지 : 토트넘이든 어떤 구단이든, 어떤 도시든. 네가 가서 뛰고 싶은 구단에 가서 네가 행복하게 축구를 하다가 은퇴하는 게 나는 최고의 바람이다. 다치지 말고 늘 지금 흥민이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매 경기 한 경기 한 경기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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